본문 바로가기
일기

의문의 빵조각

by SingerJ 2022. 1. 16.

가끔 우리집 문 앞에 빵조각이 놓여 있을 때가 있다.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누가 먹다 흘렸나? 새모이라도 줬나? 아니면 쥐새끼라도...? 조금이라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추정 중 어떤 것도 가능성 제로에 가깝지만, 아무튼 지금까진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게 요즘 잦아진 것 같은 건...과연 기분 탓일까.


사메가 발견하고는 왜 빵조각이 여기 있냐고 한게 벌써 두 번. 어제 오늘 연달아서 나도 발견. 참 이상도 하지 말이야... 거의 매일 청소 아주머니가 말끔히 복도를 청소하는데다, 스위스 이웃들의 습성상 복도에 음식물을 이렇게 자주 흘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우리 건물엔 아이들도 동물도 살지 않는다. 입주민이나 청소 아주머니 말고는 우체부도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말이지, 흘린 거라면 부스러기도 좀 주변에 떨어져 있어야 자연스러우련만 마치 누가 일부러 딱 가져다 놓은 것처럼 매번 우리집 문 앞에 정확히 놓여있는 빵조각 하나. 반짝반짝 빛날 정도로 깨끗한 복도와, 흘렸다고 보기엔 너무나 작위적으로 보이는 그 빵쪼가리의 부조화. 묘하게 수상하고 기분 나쁜 서늘함마저 자아낸다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했다. 뭐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도 아니고. 다른집 앞에도 빵조각 하나씩 갖다놔야 할라나.

퇴근한 사메에게 누가 또 우리 문 앞에 빵 흘렸어! 하니 순간 표정이 살짝 변하는거다. 왜 그러냐고 캐묻는 나에게 비웃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주고는 이만 (큰시누)의 싸이코 전 시어머니 얘기를 한다. (큰시누는 10년 전에 이혼했음. 심각한 마마보이 남편과 싸이코 시집 식구들 때문이라고 얼핏 들었는데 아흐마드를 임신한 와중에 그런 결단을 했던 걸로 보아 시집이 보통 싸이코가 아니었나 보다고 미루어 짐작해왔다) 전 시어머니가 이만의 옷가지 사이에 바짝 마른 빵조각을 넣어두곤 했다는거다. 일종의 흑마술로 부부사이를 갈라놓는 저주 같은 거라나 뭐라나. 그런 정신병자 같은 시엄마의 행동이 이만의 이혼결심에 가속도를 붙였다고. 웃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터져나오는 실소를 막을 수가 있어야지. 흑마술이라니...잠자는 숲속의 공주 추억 돋네.. -_-;;


음 그런데 닭살이 돋아오는 건 왜일까요.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웬 일...아주 없는 얘긴 아닌 모양인갑다. 종교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느니, 결혼생활을 저주하는 (주로 여자들간의) 흑마술이라든지...그런 얘기가 종종 보임. 그때부터 제법 심각하게 추리에 들어갔다. 이게 정말 흑마술 같은 거라면 이웃 중 한명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외부인은 출입이 불가하므로. 일부러 5층 우리집까지 올라오는 것 보다는 바로 앞집이거나 윗집일 가능성이 좀 더 높아 보인다. 이런 중세시대 삘 나는 올드한 미신을 행한다는 건 범인이 고령일 가능성을 높이고...나도 사메도 왠지 여자라고 생각함.


엘레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우리와 마주 보고 있는 앞집에는 아주아주 친절한 노부부가 둘이 산다. 가끔 마주칠때마다 이가 거의 빠져서 오물거리다시피 하는 미소로 안부를 꼭 물어봐주는. 윗층에는...좀 수선스럽지만 역시 매우 친절한 뮐러 아주머니가 있고, 뮐러 아줌니 옆집엔 우리 앞집 보다는 좀 젊은 노부부- 역시 매우 친절하고 주말마다 손 꼭 잡고 산책하는- 가 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볼까. 4층 아주머니는 가끔 내 소포를 건물 안으로 들여놔주는, 역시 상냥한 사람. 그 옆집은 모름. 1층엔 좀 무뚝뚝하지만 예의바른 팔레스타인 아저씨. 2층엔 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 3층 이웃은 본 적 없음.

이웃들 대상으로 흑마술 따위를 상상하고 있다니. 나 요즘 재미있는 거에 너무 목 말랐던 거 아닌가 자괴감이 들 정도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스위스 사람들 중엔 순박하고 상냥해 보이는 싸이코가 참으로 많더라고 혀를 차던 한 동료의 말을 떠올린다. CC TV라도 설치할까. 그러다 정말로 이웃 할머니가 카메라 앞에서 씨익 웃으며 빵조각을 가져다 놓는 장면이 찍혀 있기라도 하면 어쩐다? 한여름도 다 지난 마당에 때 아닌 납량특집.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날의 꿈  (6) 2022.01.17
Mr. Unlucky  (4) 2022.01.17
월급봉투와 집밥  (4) 2022.01.16
밥 얻어먹기, Everest  (5) 2022.01.16
You are my sunshine (현실 version)  (1) 2022.01.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