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딴 사과들이 그야말로 한창인 요즘이다. 사과의 고장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그것도 과수원집 외손녀였음에도 나는 사과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 언니의 사과사랑이 워낙 극진해 어릴적부터 우리집엔 늘 궤짝으로 사과가 있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한 오리온 종합선물 세트 같은 거라면 내 백번이라도 이해를 하련만, 저 큰 상자에 사과만 잔뜩 담아 팔고 또 그걸 사는 사람이 있다니...어른들의 입맛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살기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사실. 단지 우리집 식구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그 '꿀사과' 품종 (부사)이 내 취향에는 아니었던 것 뿐. 어릴 적 어느 날, 엄마가 평소와는 다른 노리끼리한 사과를 덤으로 몇 개 받아온 일이 있었다. 사과는 자고로 달고 아삭해야지 이건 영 퍼석거려 못 먹겠다는 식구들 틈에서 나만이 그 노리끼리를 썩 흡족해 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에 도착해 처음으로 장을 보던 날, 끌리듯 사 온 그 사과의 맛이 기억 속의 맛과 똑같았다. '골든 딜리셔스' 라고 했다.
오로지 부사와 홍옥과 아오리가 전부이던 나에게 독일사과들의 이름은 신세계처럼 느껴졌고, 그날부터 한가지씩 탐험이 시작되었다. 갈라, 엘스타, 재즈, 핑크레이디, 레드 딜리셔스...관심 없었을땐 몰랐는데 종류도 원산지도 참 다양하다.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자 진지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뭔가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섣불리 말하기엔 내가 경험해 본 것들이 부족해도 너무나 턱없이 부족했음을 그때 처음 절감했던 것이다.
이름이나 색감에 끌려서 샀다가 실망을 금치 못한 사과가 있는 반면 (특히 핑크레이디), 껍질이 거칠어보여 영 손이 안 가다가 예상치 못한 좋은 향에 반해 계속 사게 된 것도 있고 그리하여 내 입맛에 가장 맞는 사과를 드디어 찾았으니...'루벤스' 라는 이름이었다. 갈라와 엘스타를 접목시켜 이탈리아에서 만들었다는 이 사과는 오렌지색이 많이 돌아서 멀리서 보면 언뜻 황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향이 정말 향긋하고 새콤 달콤하면서도 신맛이 부담스럽지 않다. 무엇보다도 한 입 베어 물면 와삭 부서지는 과육의 질감이 좋다. 우리 엄마 아빠가 드셔보시면 아마 "에이, 파이다." (경상도 말로 '좋지 않다, 영 아니다' 의 뜻) 할 것 같은 ㅋㅋ 그런 질감.
사메는 '레드 딜리셔스' 를 좋아한다. 검붉은 색 껍질에서 뽀드득한 윤기가 나는...백설공주 사과의 모델일 듯한. 왼쪽이 레드 딜리셔스, 오른쪽이 루벤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던 그 철학자는 어느 사과를 좋아했을지 쓸 데 없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라면, 한그루만 심는다면 루벤스를 심을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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